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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시대의 서막, 100년 전쟁의 시작

아시겠죠? 발행일 : 2025-05-05

일본의 전국시대는 1467년 오닌의 난으로 시작되어 약 100년간 지속된 내전 시기로, 다이묘들의 패권 다툼과 하극상 풍조가 만연했던 시대다. 응인의 난이라고도 불리는 이 내전은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후계자 문제에서 비롯되어 전국적인 혼란으로 확대되었으며, 이후 센고쿠 다이묘들이 각지에서 할거하며 일본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를 열었다.

 

🏯 오닌의 난 - 혼란의 시작을 알린 11년 내전

오닌의 난은 1467년부터 1477년까지 계속된 내전으로, 아시카가 막부 8대 쇼군 요시마사의 후계자 문제가 발단이었다. 요시마사는 처음에 동생 요시미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이후 아들 요시히사가 태어나자 입장을 바꾸었다. 이 과정에서 유력 다이묘들이 두 파벌로 나뉘어 대립하기 시작했다.

동군과 서군으로 나뉜 양측 세력은 교토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고, 이로 인해 수도는 초토화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양측 모두 16만 명이 넘는 대군을 동원했으나, 장기화되면서 점차 군사력이 약화되었다. 결국 동서 양군의 총대장이었던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야마나 소젠이 모두 사망하면서 전쟁은 명확한 승자 없이 끝났다.

구분 동군 서군
총대장 호소카와 가쓰모토 야마나 소젠
지지 후계자 아시카가 요시히사 아시카가 요시미
초기 병력 약 16만 명 약 16만 명
주요 가문 하타케야마(일부), 시바(일부) 하타케야마(일부), 시바(일부)
전쟁 결과 명목상 승리 실질적 패배
 

⚔️ 하극상의 시대 - 전통적 질서의 붕괴

오닌의 난 이후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면서 하극상(下剋上) 현상이 일본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기존 상하 질서가 무너지고 실력만 있으면 누구나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시기에는 가신이 주군을 몰아내는 일이 빈번했고, 심지어 농민 출신이 다이묘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센고쿠 다이묘라 불리는 새로운 지배자들이 등장하면서 일본은 수십 개의 독립된 영지로 나뉘었다. 이들은 독자적인 법률(분국법)을 제정하고, 영지 내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전쟁이 일상화되면서 무사뿐 아니라 농민들도 전투에 동원되었고, 이는 훗날 전국시대 말기의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지는 토대가 되었다.

▲ 센고쿠 다이묘의 주요 특징

  • 독자적인 법률 제정권 보유
  • 영지 내 절대적 지배권 행사
  • 상비군 유지 및 영지 확장 추구
  • 가신단 재편성을 통한 중앙집권화
  • 경제 정책을 통한 부국강병 추진
 

🏰 주요 가문들의 흥망성쇠 - 패권을 향한 치열한 경쟁

전국시대 초기에 강성했던 가문들 중 상당수가 몰락하고 새로운 세력이 부상하는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오우치 가문은 서일본 최대 세력이었으나 가신 스에 하루카타의 반란으로 멸망했고, 그 스에 가문도 모리 모토나리에게 패하여 역사에서 사라졌다. 한편 이마가와, 다케다, 호조 가문은 3국 동맹을 맺어 관동 지방을 장악했으나, 이 동맹도 오래가지 못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오다 노부나가의 등장이다. 오와리의 작은 영주에 불과했던 그가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격파하면서 일약 전국구 다이묘로 부상했다. 이후 노부나가는 혁신적인 전술과 정책으로 천하통일의 기반을 닦았고, 그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실제로 통일을 완성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최종 승자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오다와 도요토미 정권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에도 막부를 열어 260년간 지속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처럼 전국시대는 기회와 위험이 공존하는 시기였으며, 생존을 위해서는 군사력뿐 아니라 정치적 수완도 필수적이었다.

 

🎯 전국시대가 남긴 유산 - 현대 일본에 미친 영향

전국시대는 단순한 혼란기가 아니라 일본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전환점이었다. 이 시기에 형성된 무사도 정신은 현대 일본인의 의식구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기업 문화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각 지역의 특색 있는 성곽 건축과 문화유산들은 오늘날 일본 관광산업의 중요한 자원이 되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전국시대는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을 촉진했다. 전쟁으로 인한 무기 수요 증가는 제철 기술의 발전을 가져왔고, 각 다이묘들이 부국강병을 추구하면서 광산 개발과 화폐 경제가 확산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은 에도 시대의 번영으로 이어졌다.

문화적으로는 다도, 노(能), 연가(連歌) 등이 발전했는데, 이는 전란의 시대에 무사들이 정신적 안정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특히 센노 리큐가 완성한 다도는 '와비사비'라는 일본 특유의 미의식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처럼 전국시대는 파괴와 창조가 공존했던 시기로, 현대 일본 문화의 많은 요소들이 이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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