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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닌의 난, 무로마치 막부의 몰락을 재촉하다

아시겠죠? 발행일 : 2025-05-05

1467년부터 1477년까지 장장 11년간 일본을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오닌의 난(応仁の乱)은 무로마치 막부 체제의 구조적 모순이 폭발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권력 다툼은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야마나 소젠이라는 두 거대 세력의 충돌로 이어졌고, 전국의 슈고 다이묘들이 양 진영으로 나뉘어 참전하면서 내전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교토는 전쟁터로 변해 도시의 대부분이 잿더미가 되었고, 막부의 통제력은 크게 약화되어 지방의 유력자들이 독자적 세력권을 구축하는 시대가 열렸다. 오닌의 난은 단순한 권력 투쟁을 넘어 중세 일본 사회의 봉건적 질서를 뒤흔든 사건으로, 이후 약 100년간 지속된 센고쿠(戰國) 시대라 불리는 군웅할거의 혼란기를 예고하는 서막이 되었다.

 

⚔️ 난의 발단과 두 진영의 형성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예술과 문화 활동에만 몰두했다. 1464년 아들이 없던 요시마사는 동생 요시미를 후계자로 지명했는데, 이듬해 정실 히노 도미코가 아들 요시히사를 낳으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도미코는 자신의 아들을 차기 쇼군으로 옹립하려 했고, 이는 막부 내의 권력 균형을 뒤흔들었다. 당시 막부의 실권을 쥐고 있던 호소카와 가쓰모토는 요시미를, 야마나 소젠은 요시히사를 지지하면서 두 세력 간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문제는 단순한 후계자 다툼에 그치지 않았다. 전국의 슈고 다이묘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양 진영에 가담하면서 갈등은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었다. 특히 하타케야마 가문과 시바 가문의 가독 상속 분쟁이 호소카와-야마나 대립과 얽히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1467년 1월, 하타케야마 정장과 마사나가의 상어총분소(上御霊神社) 전투를 계기로 오닌의 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교토는 곧바로 전쟁터로 변모했다.

구분 동군 (호소카와 가쓰모토) 서군 (야마나 소젠)
지지 후계자 아시카가 요시미 (쇼군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히사 (쇼군의 아들)
주요 세력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아카마쓰 마사노리 하타케야마 요시나리, 오우치 마사히로
병력 규모 약 16만 명 약 11만 명
본진 위치 교토 동부 (무로마치 고쇼 동쪽) 교토 서부 (니시진 일대)
전략적 특징 방어적 태세, 천황 보호 공격적 전술, 지방 군대 동원
주요 지역 기반 간토, 도카이 지역 주고쿠, 규슈 지역

흥미로운 점은 양측 지도자들이 모두 막부의 중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호소카와 가쓰모토는 간레이(管領)로서 막부의 행정 수반이었고, 야마나 소젠은 유력 슈고 다이묘로서 '적산(赤山)'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의 대립은 개인적 야망을 넘어 무로마치 막부 체제 자체의 구조적 모순을 반영하고 있었다. 쇼군의 권위가 약화된 상황에서 슈고 다이묘들의 세력 다툼이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달은 것이다.

🔥 11년 전쟁의 전개와 교토의 파괴

 

오닌의 난 초기, 양군은 교토 시내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특히 1467년 3월부터 10월까지 이어진 '가미교(上京) 전투'는 난의 가장 격렬한 시기였다. 동군은 무로마치 고쇼(쇼군 저택)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했고, 서군은 니시진 지역에 본진을 세워 교토 서부를 장악했다. 양군의 충돌로 교토 시가지의 대부분이 불타버렸고, 수많은 사찰과 귀족 저택이 파괴되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낮에는 연기가 하늘을 가리고, 밤에는 불빛이 대낮같이 밝았다"고 전한다.

전쟁의 장기화 요인과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명확한 승자가 없는 균형 상태 - 양군의 세력이 비슷해 결정적 승부를 내기 어려웠음
▲ 지방 세력의 연쇄적 참전 - 한쪽이 우세해지면 다른 쪽에 새로운 세력이 가담
▲ 게릴라전과 약탈전 중심 - 정면 대결보다는 소규모 기습과 보급로 차단에 주력
▲ 민중의 피해 심화 - 군량미 징발과 약탈로 일반 백성들의 고통이 극심
▲ 외교전과 이합집산 - 동맹 관계가 수시로 바뀌며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듦
▲ 막부 권위의 실추 - 쇼군이 중재자 역할을 하지 못하고 방관자로 전락

1473년 양군의 총대장인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야마나 소젠이 잇따라 사망하면서 전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그러나 전쟁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후계자들인 호소카와 마사모토와 야마나 마사토요가 지휘권을 이어받았지만, 이미 전쟁의 명분은 희미해지고 있었다. 각 다이묘들은 자신의 영지 확대와 이권 싸움에 더 관심을 기울였고, 교토에서의 전투는 점차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흥미롭게도 전쟁 기간 동안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여전히 문화 활동에 몰두했다. 그는 히가시야마 산장(훗날의 은각사) 건설을 계획하고 다도와 회화를 즐기며 현실 도피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쇼군의 무책임한 행태는 막부의 권위를 더욱 실추시켰고, 슈고 다이묘들의 독자적 행동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1477년 11월, 서군의 오우치 마사히로가 병력을 철수하면서 오닌의 난은 형식적으로 종결되었지만, 일본은 이미 회복 불가능한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 막부 체제의 붕괴와 지방 분권화

 

오닌의 난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무로마치 막부의 중앙집권 체제가 사실상 붕괴되었다는 점이다. 전란 이후 쇼군의 권위는 교토 주변 지역에만 미치는 수준으로 약화되었고, 지방의 슈고 다이묘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실질적인 독립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독자적인 법령을 제정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군대를 유지하는 등 소규모 왕국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을 역사학자들은 '슈고 영국제(守護領国制)'의 확립이라고 부른다.

전쟁 과정에서 새로운 세력도 등장했다. 기존의 슈고 다이묘를 밀어내고 권력을 장악한 센고쿠 다이묘(戰國大名)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슈고 다이묘의 가신이나 지방 호족 출신으로, 혼란기를 틈타 하극상(下剋上)을 통해 권력을 쟁취했다. 대표적인 예로 오다 가문, 모리 가문, 다케다 가문 등이 있으며, 이들은 훗날 센고쿠 시대의 주역이 된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들이 막부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실력으로 영지를 다스렸다는 사실이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전쟁으로 교토가 황폐화되면서 상업의 중심지가 지방으로 분산되었다. 사카이(堺), 하카타(博多), 오쓰(大津) 등의 항구 도시가 새로운 무역 거점으로 부상했고, 이들 도시는 상인들의 자치 조직인 '마치슈(町衆)'에 의해 운영되었다. 농촌에서는 소규모 자작농이 증가하고 촌락 공동체가 강화되면서 '소(惣)'라 불리는 자치 조직이 발달했다. 이러한 변화는 중세 일본 사회의 구조적 전환을 의미했다.

문화적으로도 지방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교토 중심의 귀족 문화가 쇠퇴하고, 각 지방에서 독자적인 문화가 꽃피기 시작했다. 다이묘들은 자신의 영지에 성곽 도시를 건설하고,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며 지역 문화의 중심지를 만들었다. 특히 선종 사찰을 중심으로 한 불교 문화와 다도, 노(能) 등의 예술이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일본 문화의 다양성이 증대되었다. 오닌의 난은 파괴와 혼란을 가져왔지만, 역설적으로 일본 문화의 지역적 다양성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 난의 역사적 의미와 센고쿠 시대로의 전환

 

오닌의 난은 일본 역사에서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분수령으로 평가받는다. 이 전쟁을 계기로 무로마치 막부의 봉건적 통치 질서가 해체되고, 약 100년간 지속된 센고쿠 시대가 시작되었다. 센고쿠라는 명칭은 중국의 전국시대에서 유래한 것으로, 수많은 다이묘들이 패권을 다투던 혼란기를 가리킨다. 이 시기 일본은 정치적으로는 분열되었지만, 사회경제적으로는 오히려 발전을 이루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난의 장기적 영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주의'의 확산이다. 가문의 혈통이나 막부의 임명장보다는 군사력과 경제력이 권력의 원천이 되었고, 이는 일본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농민이나 상인 출신도 능력만 있으면 무사가 될 수 있었고, 심지어 다이묘로 성장하는 사례도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농민 출신에서 천하인이 된 것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례다.

군사 기술의 혁신도 주목할 만하다. 오닌의 난 기간 동안 성곽 건축 기술이 발전했고, 집단 전투 전술이 체계화되었다. 특히 아시가루(足軽)라 불리는 경무장 보병의 등장은 전쟁의 양상을 크게 바꾸었다. 이들은 농민 출신의 임시 병사였지만, 장창과 철포로 무장하면서 전투의 주력이 되었다. 1543년 포르투갈인에 의해 철포가 전래된 후에는 화약 무기가 전쟁의 판도를 좌우하게 되었다.

문화사적 관점에서 보면, 오닌의 난은 '하극상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기존의 신분 질서가 흔들리면서 개인의 재능과 노력이 중시되는 사회로 변화했고, 이는 일본인의 가치관과 세계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무사도(武士道)의 개념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으며, 충성과 배신, 명예와 실리가 복잡하게 얽힌 인간 드라마가 펼쳐졌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일본 문학과 연극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고, 현대 일본인의 정신세계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결론적으로 오닌의 난은 단순한 권력 다툼을 넘어 일본 사회 전반의 구조적 전환을 초래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막부 체제의 모순이 폭발하면서 시작된 이 전쟁은 봉건적 질서의 붕괴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비록 11년간의 전란으로 수많은 인명과 재산이 희생되었지만, 이를 통해 일본은 더욱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사회로 진화할 수 있었다. 오닌의 난은 파괴와 창조, 혼란과 기회가 공존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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