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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문화의 정수, 일본 미학의 원형을 찾아서

아시겠죠? 발행일 : 2025-05-05

무로마치 시대 후기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1436-1490)가 정치보다는 예술과 문화에 심취해 발전시킨 '히가시야마 문화'는 일본 미학의 중요한 원형을 보여준다. 교토 동쪽 언덕에 위치한 은각사(긴카쿠지)를 중심으로 꽃피운 이 문화는 금박으로 화려함을 뽐내는 금각사와 달리 수수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와비(侘)와 사비(寂)로 대표되는 일본 특유의 미의식은 완벽함보다 불완전함을, 화려함보다 소박함을, 인공적 장식보다 자연스러운 노화를 아름답게 여기는 감성적 가치관을 정립했다. 돌과 모래, 이끼만으로 우주의 이치를 표현한 가레산스이(枯山水) 정원과 간결하면서도 깊은 의미를 담은 건축 양식은 선불교의 영향 아래 발전한 동양 미학의 결정체이자, 현대 미니멀리즘에도 깊은 영향을 준 미적 원칙으로 세계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 은각사와 히가시야마 문화의 탄생

히가시야마 문화는 무로마치 막부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1482년 교토 동쪽 산기슭에 자신의 별장 '히가시야마덴(東山殿)'을 건립하면서 본격적으로 꽃피우기 시작했다. 요시마사는 정치보다 예술과 문화에 관심이 많았으며, 유력 슈고 다이묘들에게 정무를 맡긴 채 자신은 문화 활동에 집중했다. 그는 정원사 젠아미, 가노파 화가 마사노부, 노가쿠 명인 온아미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곁에 두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조성된 히가시야마덴은 요시마사 사후 지쇼지(慈照寺)라는 사찰로 변모했으며, 관음전(은각)이 금각사의 사리전(금각)과 대비되어 '은각사'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구분 기타야마 문화 히가시야마 문화
시대 무로마치 전기 (14-15세기 초) 무로마치 후기 (15세기 후반)
주도자 아시카가 요시미쓰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 (8대 쇼군)
대표 건축물 금각사 (로쿠온지) 은각사 (지쇼지)
미적 특징 화려함, 웅장함, 국제성 절제미, 간결함, 자연스러움
건축 양식 금박 장식, 화려한 외관 자연목 활용, 소박한 마감
정원 형태 연못 중심의 회유식 가레산스이, 모래와 돌 활용
예술 장르 노(能), 교겐(狂言), 회화 다도, 서원건축, 수묵화
영향 받은 문화 중국 원나라, 고려 일본 선종, 토착 문화

은각사는 금각사와 달리 실제로 은을 입히지 않은 수수한 외관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건설 도중에 요시마사가 서거했다" 또는 "원래 은박을 두를 예정이 없었다"는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흥미롭게도 이 '미완성'의 상태가 오히려 히가시야마 문화의 미학적 본질을 드러내는 상징이 되었다. 완벽함보다는 여백과 불완전함을 통해 더 깊은 의미를 찾는 와비사비의, 미학이 건축물 자체에 체현된 것이다.

히가시야마 문화의 또 다른 특징은 선종 불교의 영향이다. 중국에서 전래된 선불교(일본에서는 젠, 禪)는 화려한 의식보다 간결한 수행과 직관적 깨달음을 중시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은 건축과 정원, 회화 등 예술 전반에 영향을 미쳐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하고 본질에 집중하는 미적 원칙을 확립했다. 은각사의 동구당(東求堂)은 이러한 히가시야마 문화의 경향이 짙게 남아있는 국보급 건물로, 훗날 발전한 서원건축과 다실의 원형이 되었다.

🍃 와비와 사비: 일본 미학의 정수

 

히가시야마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미적 개념은 '와비(侘)'와 '사비(寂)'다. 이 두 개념은 일본 특유의 미의식으로, 오늘날까지도 일본 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와비는 "부족하고 결핍된 상태"를 의미하며, 사비는 한자가 알려주듯 "조용함이나 적적함, 적막함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두 개념은 불교, 특히 선종의
영향으로 긍정적인 미적 가치로 승화되었다.

와비와 사비가 내포하는 핵심 미학적 가치를 살펴보면:

▲ 불완전성 - 완벽함보다 결핍과 부족함에서 오는 아름다움 인식
▲ 무상감(無常感) - 시간의 흐름과 변화를 받아들이는 태도
▲ 간결함 -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고 본질에 집중하는 절제미
▲ 자연스러움 - 인위적 장식보다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소박함
▲ 비대칭성 - 완벽한 균형보다 의도적 불균형을 통한 긴장감
▲ 고독감 - 적막과 고요함 속에서 느껴지는 깊은 정서
▲ 일상성 - 화려한 예외보다 일상의 소소함에서 찾는 깊은 의미

이러한 미학적 관점은 일본의 다양한 예술 형식에 반영되었다. 특히 '와비차'라 불리는 다도(茶道)는 와비사비 미학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중국의 화려한 취향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고 불완전한 도구를 사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또한 하이쿠(俳句)와 같은
간결한 시 형식, 노(能)와 같은 절제된 연극, 수묵화 등의 회화 양식에서도 이러한 미의식이 강하게 나타난다.

와비사비 미학의 가장 큰 특징은 서양의 전통적 미학과는 다른 방향성이다. 서양 미학이 주로 영원불변한 이상적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면, 일본의 미학은 덧없음과 변화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이는 "존재는 무상, 고행, 공허의 세 가지 진리로 특징지어진다"는 불교의 가르침과 연결되며, 와비사비는 이러한 필연적 개념에서 오는 매력을 설명해준다. 필멸성과 불완전함을 슬퍼하기보다 그 속에서 평화로움을 찾는 태도가 히가시야마 문화의 정신적 핵심이다.

🪨 가레산스이: 돌과 모래로 표현한 우주

 

히가시야마 문화의 가장 독특한 표현 방식 중 하나는 '가레산스이(枯山水)'라 불리는 일본 특유의 정원 양식이다. '가레산스이'는 '물을 사용하지 않고 석재의 조합으로 산수의 풍경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정원'으로 정의된다. 이 정원 양식은 13-14세기 선종 사찰의 작은 뜰에서 성립되기 시작해 무로마치 시대에 완성되었으며, 은각사의 정원도 이러한 가레산스이의 전통을 잘 보여준다.

은각사 정원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긴샤단(銀沙灘)'과 '고게쓰다이(向月台)'다. 긴샤단은 하얀 모래를 평평하게 펴고 직선적인 무늬를 그린 공간이며, 고게쓰다이는 모래를 쌓아 만든 원추형 구조물로 후지산을 상징한다. 이러한 추상적 표현 방식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깊은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선종 사상에 따르면 작은 정원 속에 우주의
이치가 담겨 있으며, 명상을 통해 이를 깨닫는 것이 수행의 한 방법이다.

가레산스이 정원이 발달하게 된 배경에는 실용적인 이유도 있었다. 산에서 도시로 들어온 선종 사원은 넓은 정원터를 구하기 힘들고 연못물을 끌어오기도 쉽지 않아, 규모를 축소하는 대신 내용을 더욱 추상화, 상징화했다. 이러한 제약이 오히려 창의적인 표현 방식을 탄생시켰고, 가레산스이는 '가장 일본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정원 형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은각사의 가레산스이 정원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보다 인간의 철학적 해석을 통해 재구성한다. 선승들은 이러한 자연과 대면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명상하며, "보이지 않는 것 속에서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며, 자기 존재를 부정하면서 자신을 세우는" 선종의 이념을 체현한다. 이는 단순한 감상을 넘어 종교적, 철학적 체험으로서의 정원 문화를 보여주는 예다. 소박한 소재로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가레산스이는 오늘날의 미니멀리즘과도 통하는 미적 원칙을 보여준다.

🌿 현대에 살아있는 히가시야마 미학

 

히가시야마 문화에서 발전한 미학적 원칙들은 현대 일본 문화와 글로벌 디자인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엇보다 '적은 것이 더 많다(less is more)'는 원칙은 20세기 미니멀리즘의 핵심 철학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와 같은 현대 건축가들이 추구한 절제되고 기능적인 미학은 500년 전 히가시야마 문화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었다.

일본 현대 디자인의 세계적 성공 사례인 무인양품(MUJI)이나 유니클로(UNIQLO)의 철학에서도 히가시야마 미학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하고 소재와 기능에 집중하는 이들 브랜드의 접근 방식은 와비사비 미학의 현대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긴쓰기(金継ぎ)'라 불리는 깨진 도자기를 금으로 수리하는 전통 기법은 결함을 숨기기보다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와비사비 철학의 구체적 표현이다.

히가시야마 미학은 단순한 미적 취향이 아니라 세계관과 가치관이 반영된 총체적 문화 현상이다. 일본인들은 "자기 연민 속에서 우울해지기보다" 필연적인 무상함과 불완전함에서 "매력을 설명해주는" 와비사비를 통해 독특한 미적 감수성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 사회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완벽함을 향한 끝없는 추구와 소비주의의 과잉 속에서 불완전함의 미학은 대안적 가치관을 제시한다.

오늘날 은각사는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은각사 정원은 사계절 각각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하며, "동백이나 철쭉 등의 꽃들과 단풍, 눈이 오는 풍경" 등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 자체가 중요한 미적 요소가 된다. 이는 영원불변한 완벽함보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하는 아름다움을 추구한 히가시야마 미학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은각사는 이제 전 세계인의 문화적 자산이 되었다. 흥미롭게도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금각사보다 은각사가 좋았다"고 말한다는 점은 화려함보다 "주변과의 조화로움에 더 무게를 두는" 미적 감수성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히가시야마 문화의 정수인 와비사비 미학은 국경을 넘어 보편적 가치로 인정받으며, 현대 사회의 미적, 철학적 담론에 중요한 기여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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