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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재앙 속의 민족 차별

아시겠죠? 발행일 : 2025-05-12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 지역을 강타한 규모 7.9의 관동대지진은 자연재해를 넘어 인간이 만들어낸 비극의 서막이었다. 지진과 그에 따른 화재로 인해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1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가운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가 급속도로 퍼졌다.

이로 인해 자경단과 군경, 일반 시민들에 의해 약 6,000여 명의 무고한 조선인들이 무참히 학살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 비극적 사건은 일본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식민지 차별의식과 공황 상태에서의 집단 폭력성이 결합된 역사의 어두운 장으로, 오늘날까지도 제대로 된 진상 규명과 공식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은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다.

 

🌋 대지진의 발생과 혼돈의 도시

관동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시간으로 점심시간에 맞춰 발생했다. 당시 많은 가정에서 점심 식사를 준비하느라 화덕에 불을 피우고 있었고, 이것이 대규모 화재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지진의 진원지는 사가미 만 북부 해저로, 요코하마에서 80km 떨어진 곳이었다. 당시 측정된 규모는 7.9에 달했으며,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관동 지역 전체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지진 그 자체보다 더 끔찍한 것은 이어진 화재였다. 목조 건물이 대부분이었던 도쿄는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고, 강한 바람으로 인해 화재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재해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도쿄 시내의 약 70%가 화재로 소실되었고, 요코하마는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사망자 수는 공식 집계로 10만 5천여 명에 달했으며, 부상자는 약 10만 명, 실종자는 4만 3천여 명이었다. 특히 혼조 지역의 육군 피복창 터에서는 3만 8천여 명이 화재로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곳에 모여든 수많은 피난민들이 갑작스러운 회오리바람으로 인한 화염에 휩싸여 집단 질식사한 것이다. 당시 도쿄의 인구가 약 380만 명이었으니, 시민의 약 3%가 이 재해로 목숨을 잃은 셈이다.

관동대지진 피해 현황 도쿄 요코하마 기타 지역 총계
사망・실종자 약 7만 명 약 2만 5천 명 약 1만 명 약 10만 5천 명
건물 피해 36만 6천 채 9만 4천 채 7만 6천 채 53만 6천 채
화재 발생 136건 113건 92건 341건
소실 면적 약 44% 약 73% - -
경제적 손실 약 30억 엔 (당시 일본 국가 예산의 약 1.5배)      

혼란 속에서 도시는 기능을 상실했다. 수도, 전기, 가스 등 모든 라이프라인이 끊겼고, 도로와 철도가 파괴되어 교통과 통신이 마비되었다. 생필품 공급이 중단되면서 식량과 식수 부족 사태가 심각해졌다. 정부와 행정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질서와 공포가 도시 전체를 뒤덮었다. 이런 극도의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재앙의 원인과 책임을 찾기 시작했고, 그 화살은 당시 일본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였던 조선인들에게 향하게 되었다.

👥 유언비어의.확산과 조선인 학살의 전개

 

지진 발생 직후 도쿄와 요코하마 일대에는 "조선인들이 방화와 약탈을 일으키고 있다", "우물에 독을 풀었다", "폭탄을 던지고 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번개처럼 퍼져나갔다. 누가 이런 유언비어를 최초로 퍼뜨렸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당시 일본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조선인에 대한 차별의식과 공포심이 그 바탕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흥미로운 점은 정부와 언론이 이 유언비어를 진화하기는커녕 오히려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내무성은 9월 2일 "불령선인(不逞鮮人, 불온한 조선인)에 주의하라"는 경고문을 발표했고, 신문들은 확인되지 않은 조선인 폭동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 조선인 학살 촉발 요인
▲ 정부와 언론의 유언비어 확산 방조
▲ 계엄령 선포와 자경단 결성 허가
▲ 조선인 식별을 위한 '발음 테스트' 실시
▲ 경찰과 군대의 묵인과 가담

유언비어가 확산되자 일본 각지에서는 '자경단'이라 불리는 민간 자위조직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죽창, 일본도,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하고 조선인을 찾아 나섰다. 자경단의 규모는 3,000개 이상의 단체에 약 70만 명이 참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일본어 발음을 테스트해 조선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지진'을 뜻하는 '지신(地震)'이나 '15엔 50전'과 같은 발음이 어려운 단어들을 말하게 하여 발음이 어색하면 조선인으로 간주하고 폭행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매우 불완전했고, 많은 일본인들도 지방 방언을 쓴다는 이유로 피해를 입었다.

학살은 도쿄, 요코하마뿐 아니라 가나가와, 사이타마, 지바 등 인근 지역으로도 확산되었다. 특히 조선인 거주 지역이나 노동자들이 많이 일하던 공장 주변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곳은 도쿄의 요도바시 지역과 가나가와현의 후지사와 지역이었다. 학살의 방식은 극도로 잔혹했다. 몽둥이와 죽창으로 구타하고, 칼로 찌르고, 때로는 생매장하기도 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조선인들을 집단으로 모아놓고 학살하는 사례도 있었다. 경찰이나 군인들은 학살을 막기는커녕 종종 자경단에 합류하거나 묵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들은 경찰서에 보호를 요청했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자경단에게 넘겨지는 경우도 있었다.

🔍 학살의 진상과 은폐의 역사

 

관동대지진 당시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학살되었을까? 정확한 희생자 수는 아직까지도 확정되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231명이지만, 이는 명백히 축소된 수치다. 도쿄지방법원 검사국의 내부 보고서에는 약 2,600명이라는 숫자가 언급되어 있으며, 재일 조선인 단체와 한국 측 연구에서는 최대 6,000여 명의 조선인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학살 희생자 중에는 중국인과 오키나와인, 지방 출신 일본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인뿐 아니라 '타자'로 분류될 수 있는 모든 이들이 공격의 대상이 된 것이다.

학살이 벌어지는 동안 일본 정부와 군부는 어떤 조치를 취했을까? 가네코 겐타로 내무대신은 9월 2일 계엄령 선포를 내각에 건의했고, 야마나시 한조 육군대신은 이를 받아들여 도쿄와 인근 6개 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표면적으로는 치안 회복을 위한 조치였지만, 사실상 군의 자의적 판단에 따른 조선인 탄압을 합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후쿠다 마사타로 중장은 "사회주의자와 불령선인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는 조선인 학살에 군이 직접적으로 가담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지진 직후부터 일본 정부는 학살의 진상을 은폐하려 노력했다. 도쿄와 요코하마에 외국인 기자들의 출입을 제한했고, 조선인 피해 상황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언론을 통제했다. 이후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에 대한 자료는 의도적으로 파기되거나 비공개 처리되었다. 특히 도쿄지방재판소의 '대정대진재 때의 폭행사건 처리 개요'와 같은 중요 문서는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1963년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이 있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지만, 그 규모와 정부 책임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공식 사과와 배상 등의 과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 비극의 의미와 역사적 교훈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은 단순한 재난 시기의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일본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식민지 차별 의식의 폭발적 분출이었다. 1910년 한국 강제병합 이후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이미 일상적인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었다. 저임금 단순 노동에 종사하며 빈민가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일본 사회의 최하층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고정관념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대지진이라는 극단적 상황은 이러한 잠재적 차별 의식이 폭력으로 표출될 수 있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

학살의 과정에서 드러난 또 다른 측면은 위기 상황에서의 집단 심리다. 재난으로 인한 극도의 공포와 불안, 통제력 상실 속에서 사람들은 스스로의 무력함을 보상받기 위해 '적'을 찾아 공격하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정부와 언론이 특정 집단을 희생양으로 지목하면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된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 사회의 불안과 공포를 해소하기 위한 완벽한 희생양이 되었다. 이는 오늘날에도 재난과 위기 상황에서 소수자와 외국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쉽게 촉발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사례다.

이 비극적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상을 밝히는 일의 중요성이다. 일본 정부는 아직까지 조선인 학살에 대한 명확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교과서에서도 이 사건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의 어두운 부분을 직시하고 반성하지 않는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할 위험성이 항상 존재한다. 또한 이 사건은 재난 상황에서 소수자 보호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위기 상황일수록 약자와 소수자가 더 큰 위험에 처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로부터 거의 10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많이 남아있다. 정확한 피해 규모와 학살의 주체, 정부의 책임 등에 대한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 또한 희생자와 유족들에 대한 공식 사과와 배상도 이루어져야 한다. 최근 한일 양국의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진상 규명과 추모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일본 내에서도 양심적인 학자와 시민들의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의 진실을 직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한일 관계를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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