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코리안의 역사 식민지배에서 다문화공생으로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조선 출신자와 그 후손들을 지칭하는 재일코리안의 역사는 일제 식민지배부터 현재까지 일본 사회의 변화와 한일관계의 부침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소수민족 집단의 역동적 변천 과정이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경제적 어려움과 강제동원으로 일본에 건너간 조선인들은 해방 후에도 다양한 이유로 귀국하지 못한 채 일본 사회에 정착했으며, 1945년 약 200만 명에 달했던 인구는 귀환으로 감소했지만 현재도 약 55만 명의 재일코리안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다.
냉전 시기 재일코리안 사회는 조선총련(친북)과 민단(친남)으로 분열되며 조국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내면화했고, 취업·교육·결혼 등 일상의 다양한 영역에서 차별과 배제를 경험했지만, 1965년 한일기본조약 이후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가 일부 개선되고 세대교체와 함께 정체성 다양화가 진행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특별영주자 제도 도입, 공적 영역에서의 지문날인 철폐, 국적 조항 완화 등 다문화공생 정책이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혐한 정서와 구조적 차별이 남아있어 완전한 사회통합의 과제가 지속되고 있다.
🛳️ 식민지 시기 조선인의 일본 이주와 강제동원
일본으로의 조선인 대규모 이주는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식민지 지배 체제가 확립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초기에는 주로 경제적 이유로 자발적 이주가 이루어졌다. 일제의 식민지 농업 정책으로 몰락한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일했고, 1915년에는 약 3,000명이었던 재일조선인 인구가 1930년에는 약 41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들은 주로 오사카, 교토, 도쿄 등 대도시의 공업 지대에 집중 거주했으며, 광산, 건설현장, 공장 등에서 저임금 단순노동에 종사했다. 당시 재일조선인들은 일본 내 산업화의 최하층 노동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도시 빈민가에 형성된 조선인 집단 거주지는 '잇큐(一九)'라 불리며 차별과 사회적 격리의 대상이 되었다.
시기 | 이주 특성 | 인구 규모 | 사회적 지위 | 주요 거주지 |
---|---|---|---|---|
1910-1938 | 경제적 자발적 이주 | 약 80만 명(1938년) | 식민지 하층민 | 오사카, 도쿄, 큐슈 공업지대 |
1939-1945 | 강제동원 및 노무징용 | 약 200만 명(1945년) | 강제노동자 | 전국 탄광, 공장, 군사시설 |
1945-1952 | 귀환 및 재정착 | 약 60만 명(1952년) | 무국적 외국인 | 기존 집단 거주지 |
1952-1990 | 법적 지위 제한 | 약 68만 명(1990년) | '협정영주자', '일반외국인' | 오사카, 도쿄, 교토, 효고 |
1990-현재 | 다양화 및 통합 | 약 55만 명(2023년) | '특별영주자', 귀화자, 뉴커머 | 전국적 분산, 도시 중심 |
1930년대 말부터 태평양전쟁 시기에 걸쳐 조선인 이주의 성격은 더욱 강제적인 형태로 변모했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 제정 이후 일본은 전시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인 노동자 모집에 나섰고, 초기의 '모집'은 점차 '관알선'을 거쳐 1944년부터는 노골적인 '징용'으로 발전했다. 전쟁 막바지에는 약 72만 명의 조선인이 군수공장, 탄광, 건설현장 등에 동원되었고, 군인과 군무원으로 징집된 조선인도 약 36만 5천 명에 달했다. 특히 홋카이도, 규슈 등의 탄광이나 히로시마, 나가사키와 같은 군수공장 지역에 많은 조선인이 배치되었다. 이들은 열악한 노동 환경과 차별적 대우 속에서 일했으며, 탈출을 시도할 경우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당시 많은 조선인 희생자가 발생한 것도 이러한 강제동원의 결과였다.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일본에서의 생활 면에서도 심각한 차별을 경험했다. 임금 차별은 물론이고, 식량 배급과 주거 환경에서도 일본인 노동자와 상당한 격차가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일본어 능력 부족과 문화적 차이로 인해 일본 사회에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체적인 상조회와 같은 공동체 조직을 형성하며 서로를 돕고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일제 말기 재일조선인의 수는 약 200만 명에 이르렀고, 이들 중 상당수가 종전 후에도 여러 이유로 일본에 남게 되면서 오늘날 재일코리안 사회의 기틀이 형성되었다. 식민지 시기 조선인의 일본 이주와 강제동원 경험은 해방 이후에도 재일코리안 사회의 집단적 기억으로 남아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 전후 재일코리안의 법적 지위와 생활상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 직후, 일본에 거주하던 약 200만 명의 조선인들은 극적인 환경 변화를 맞았다. 해방의 기쁨과 함께 귀환의 물결이 일어나 1946년 말까지 약 140만 명이 한반도로 돌아갔다. 그러나 약 60만 명은 여러 이유로 일본에 남았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일본에서 태어나 조선말을 모르거나, 재산과 생계 기반이 일본에 있었거나, 한반도의 정치적 혼란을 우려한 경우였다. 이들의 법적 지위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일본의 주권이 회복되면서 중대한 변화를 겪었다. 일본 정부는 '외국인등록령'을 통해 이전까지 '일본 국적자'였던 조선인들의 국적을 일방적으로 박탈했고, 이들은 하루아침에 '외국인'이 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전후 일본 사회가 식민지 지배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외국인 신분이 된 재일코리안들은 다양한 법적 제약과 차별에 직면했다. 공무원, 교사, 의사, 약사 등 많은 직업에 국적 제한이 있어 취업에 큰 제약을 받았고, 주택 임대, 결혼, 금융 서비스 이용 등 일상생활 전반에서 차별을 경험했다. 특히 외국인등록제도는 재일코리안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14세 이상 모든 외국인은 지문날인을 의무적으로 해야 했고, 외국인등록증을 항상 소지해야 했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처벌받았다. 이러한 제도는 재일코리안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차별적 관행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사회보장 측면에서도 국민연금, 국민건강보험, 아동수당 등에서 배제되는 등 심각한 불이익이 있었다.
▲ 전후 재일코리안의 주요 법적 차별과 투쟁
▲ 외국인등록법 하의 지문날인 의무 - 1985년 지문날인 거부 운동 전개, 1999년 폐지
▲ 국민연금 가입 자격 제한 - 1982년 국제인권규약 비준과 함께 완화
▲ 공영주택 입주 제한 - 1970년대 이후 점진적 철폐
▲ 공무원 채용 국적 제한 - 1990년대 이후 일부 지자체에서 완화
▲ 참정권 배제 - 현재까지 지방참정권도 미부여
▲ 교육의 자유 제한 - 조선학교 법적 지위 문제와 보조금 차별 지속
재일코리안 사회는 냉전 체제의 영향으로 이데올로기적 분열도 겪었다. 1945년 결성된 '재일본조선인연맹'은 1949년 일본 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이후 북한을 지지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와 남한을 지지하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으로 분열되었다. 이 두 단체는 오랫동안 재일코리안 사회의 정치적 지형을 양분했다. 특히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진행된 '북송사업'은 재일코리안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약 9만 3천 명의 재일코리안과 일본인 배우자가 북한으로 이주했는데, 이들 중 많은 이들이 북한에서 어려운 생활을 겪었고 일부는 이후 일본으로 탈출하기도 했다. 이처럼 재일코리안 사회는 냉전 시대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며,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과 일본 사회에서의 위치를 고민해야 했다.
🗓️ 한일기본조약과 재일코리안 지위의 변화
1965년 체결된 한일기본조약과 부속협정은 재일코리안의 법적 지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재일 3세대에 걸친 영주권 부여'를 핵심으로 하는 '재일동포 법적지위 협정'이 체결되며, 한국 국적 재일코리안들은 '협정영주자' 자격을 얻게 되었다. 이로써 강제퇴거로부터의 보호와 재입국 허가 등 일정한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협정에는 중대한 한계가 있었다. 첫째, 조약 체결 당시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 국적자와 그 직계비속에게만 적용되어 북한 국적자나 무국적자는 혜택을 받지 못했다. 둘째, 한일 양국 정부가 재일코리안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는 특별한 지위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일반적인 외국인 관리의 틀 안에서 일부 혜택을 부여한 수준에 그쳤다. 셋째, 재일코리안들의 요구 중 핵심이었던 국적에 따른 차별 철폐와 참정권 부여 등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한일기본조약 체결 이후 재일코리안 사회는 세대교체와 함께 점진적 변화를 겪었다. 1970년대부터 일본에서 출생하고 교육받은 2세, 3세가 사회의 주류로 부상하면서, 조국 지향적이었던 1세대와 달리 일본 사회와의 공존과 권리 획득을 위한 실천적 운동이 확산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지문날인 거부 운동, 공영주택 입주권 쟁취 운동, 취업 차별 철폐 운동 등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일본 내 진보적 시민단체, 노동조합, 종교단체 등과의 연대를 통해 사회적 지지 기반도 확대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80년대 들어 일본 정부가 국제인권규약을 비준하고 난민협약에 가입하면서 더욱 탄력을 받았다. 특히 1982년 국적 조항이 철폐되며 재일코리안도 국민연금과 국민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게 되었다.
재일코리안의 정체성도 다양화되었다. 식민지 경험과 조국의 분단이라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재일코리안들은 '조선인/한국인', '재일/자이니치', '일본 국민/외국인' 등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정체성을 형성해왔다. 세대가 내려갈수록 일본 사회에 문화적으로 동화되는 경향이 강해졌고, 일본인과의 국제결혼 비율도 증가해 현재는 약 80%에 이른다. 또한 귀화를 선택하는 경우도 늘어나 1952년부터 현재까지 약 37만 명의 코리안이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그러나 일본 국적 취득이 완전한 사회적 통합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많은 귀화자들이 여전히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며 '일본 국적 코리안'으로서 이중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더블'(일본인과 코리안의 혼혈)이나 '뉴커머'(1980년대 이후 새롭게 이주한 코리안) 등 더욱 다양한 배경의 구성원들이 재일코리안 사회에 편입되면서, 단일한 카테고리로 규정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공동체로 변모하고 있다.
📱 현대 일본 사회와 재일코리안의 도전
1991년 시행된 '개정 출입국관리법'과 '특별영주자제도'는 재일코리안의 법적 지위에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다. 이 제도는 한일기본조약의 '협정영주자' 자격보다 확대된 개념으로, 조선적(북한 국적)자도 포함해 모든 구 식민지 출신자와 그 후손들에게 안정적인 체류 자격을 부여했다. 여기에는 강제퇴거 사유 제한, 재입국 절차 간소화, 영주자격 유지 조건 완화 등의 내용이 담겼다. 또한 1993년에는 외국인등록증 상시 휴대 의무가 철폐되었고, 1999년에는 30년 넘게 지속된 지문날인 제도가 폐지되었다. 2012년에는 외국인등록법이 폐지되고 새로운 체류관리제도가 도입되었는데, 특별영주자에게는 '특별영주자증명서'가 발급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재일코리안에 대한 감시와 통제 중심의 정책에서 점차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들도 남아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참정권 문제다. 재일코리안들은 일본 사회에서 납세와 각종 의무를 다하면서도 국정 참여의 권리는 전혀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지방참정권 부여에 대한 논의도 지속되었지만, 보수 정치권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교육 영역에서도 민족교육의 법적 지위 문제가 쟁점이다. 조선학교는 '각종학교' 지위에 머물러 있어 고교무상화 혜택에서 제외되고 있고, 조선대학교는 대학 인가를 받지 못해 졸업생들이 취업 등에서 불이익을 받고 있다. 특히 2019년 10월 한일관계 악화를 배경으로 조선학교에 대한 보조금 지급이 중단된 것은 교육과 외교 문제가 연관되는 사례를 보여주었다. 또한 취업, 주택, 결혼 등 일상생활에서의 미묘한 차별은 법적 제도와 별개로 여전히 존재한다.
2000년대 이후 새로운 도전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혐오 표현과 증오 범죄의 증가다. '재특회(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모임)' 같은 극우단체의 활동과 온라인상의 '헤이트 스피치'는 재일코리안 공동체에 큰 심리적 위협이 되었다. 2016년 '헤이트 스피치 해소법'이 제정되어 법적 대응의 근거가 마련되었지만, 실질적인 처벌 조항이 없어 효과는 제한적이다. 한편, 재일코리안 사회 내부에서도 변화와 도전이 이어지고 있다. 전통적인 민단과 총련의 영향력은 약화되고, 새로운 형태의 시민단체와 문화 커뮤니티가 등장했다. 또한 재일코리안 4세, 5세 세대의 정체성은 더욱 복합적이고 유동적인 성격을 띄며, 단일한 민족 정체성보다는 다중적이고 혼종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이들은 '자이니치'(在日)라는 정체성을 일본과 한국/조선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독자적 범주로 인식하기도 한다. 오늘날 재일코리안 사회는 인구 감소와 고령화, 정체성의 다양화, 국제 정세의 변화 등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동시에 일본 사회의 다문화공생 실현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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