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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간세이 개혁, 마지막 중흥의 시도

아시겠죠? 발행일 : 2025-05-07

다누마 오키쓰구의 부패 정치로 혼란에 빠진 에도 막부를 구하고자 나선 개혁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8대 쇼군 요시무네의 손자이자 시라카와 번주였던 그는 엄격한 절약 정책과 농본주의 회귀를 내세우며 간세이 개혁을 단행했다. 비록 시대적 한계로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그의 개혁 정신과 위민 사상은 막부 말기 최후의 중흥 시도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간세이 개혁은 보수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접근으로 잠시나마 막부의 위기를 늦추는 데 기여했다.

 

🎓 요시무네의 손자, 개혁가의 탄생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태어날 때부터 남달랐다.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손자이자 시라카와 번의 영주로서, 그는 일찍부터 뛰어난 행정 능력을 보였다. 특히 텐메이 대기근 때 시라카와 번에서는 단 한 명의 아사자도 내지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런 치적은 그가 단순한 명문가 자제가 아닌 실력 있는 정치가임을 증명했다.

청년 시절부터 유학에 심취했던 사다노부는 학문적 소양도 탁월했다. 그는 주자학을 깊이 연구했고, 특히 검약과 농본주의를 강조하는 유교적 이상을 정치 철학으로 삼았다. 다누마 시대의 부패와 사치를 목격하면서 그의 개혁 의지는 더욱 굳어졌다.

구분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다누마 오키쓰구
출신 배경 쇼군가 손자, 명문 하급 무사 출신
정치 철학 유교적 농본주의 중상주의
개혁 방향 검약, 도덕 중시 상업 진흥, 실리 추구
리더십 스타일 원칙주의적 실용주의적
대외 정책 쇄국 유지 제한적 개방 시도

1787년, 다누마가 실각하고 11대 쇼군 이에나리가 즉위하자 사다노부는 불과 30세의 나이로 로주 수좌(首座)에 임명됐다. 그는 즉시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했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에 남은 '간세이 개혁'의 시작이었다.

💰 재정 재건과 검약령 - 긴축의 시대

 

사다노부가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재정 재건이었다. 다누마 시대의 방만한 재정 운영으로 막부 금고는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그는 엄격한 긴축 정책을 시행하면서 지출을 대폭 줄였다. 쇼군가의 생활비조차 절반으로 삭감했고, 불필요한 의전과 행사도 폐지했다.

특히 눈에 띄는 조치는 '간략령(倹約令)'이었다. 이는 사치품 사용을 금지하고 의복이나 음식, 주거 등 생활 전반에 걸쳐 검소함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머리 장식이나 화장품까지 규제 대상이 됐다. 이런 극단적인 절약 정책은 상업 활동을 위축시켰지만, 재정 건전화에는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다.

간세이 개혁의 주요 재정 정책들 -
▲ 쇼군가 경비 50% 삭감
▲ 다이묘 대출금 일부 탕감
▲ 하타모토(旗本) 구제 기금 조성
▲ 쌀 비축 제도 강화
▲ 통화량 조절로 물가 안정화

농촌 부흥에도 힘을 쏟았다. 토지 개간을 장려하고, 농민들의 도시 유출을 막기 위한 정책을 폈다. 또한 '칠분 적금제'를 도입해 풍년일 때 수확량의 일부를 비축하도록 했는데, 이는 기근에 대비한 현명한 조치였다. 실제로 이 제도는 이후 발생한 흉작 때 큰 도움이 됐다.

📚 교육과 사상 통제 - 주자학의 절대화

 

사다노부는 정신적 개혁도 중시했다. 그는 주자학을 정통 학문으로 규정하고, 다른 학파들을 이단으로 배척했다. 이른바 '이학(異學)의 금'이라 불리는 정책이었다. 막부 직할 교육기관인 쇼헤이자카 학문소에서는 오직 주자학만 가르치도록 했고, 다른 사상은 엄격히 통제했다.

이런 사상 통제는 사회 전반으로 확대됐다. 출판물 검열이 강화됐고, 풍속을 해친다고 판단되는 서적들은 금서로 지정됐다. 특히 유곽이나 가부키를 다룬 대중 문학들이 주요 단속 대상이 됐다. 이는 문화의 다양성을 억압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교육 진흥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각 번에 학교 설립을 장려했고, 서민 교육 기관인 데라코야(寺子屋)도 지원했다. 또한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시험 제도를 개선했다. 이런 노력은 막부 말기 지식인 계층의 성장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사다노부는 역사 편찬 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도쿠가와 실록' 편찬을 지시했고, 각종 고문서 수집과 보존에도 힘썼다. 이는 막부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귀중한 역사 자료들이 보존되는 계기가 됐다.

⚖️ 개혁의 한계와 실각 - 이상과 현실의 괴리

 

사다노부의 개혁은 분명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재정이 어느 정도 안정됐고, 사회 기강도 바로잡혔다. 하지만 지나치게 엄격한 통제 정책은 점차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상인들과 도시 주민들의 불만이 컸는데, 경제 활동이 위축되면서 생활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도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젊은 쇼군 이에나리는 사다노부의 엄격한 간섭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또한 보수적인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들도 점차 목소리를 높였다. 결정적으로 러시아 사절 라크스만과의 외교 문제 처리를 둘러싸고 비판이 일었다.

1793년, 사다노부는 결국 로주직에서 물러났다. 불과 6년간의 짧은 집권이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적지 않았다. 비록 시대의 흐름을 되돌리지는 못했지만, 막부 체제의 수명을 조금은 연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실각 후 막부는 다시 점진적인 쇠퇴의 길을 걸었다.

사다노부의 개혁이 실패한 근본 원인은 시대적 한계에 있었다. 이미 상품경제가 발달하고 신분제가 동요하는 상황에서, 과거로의 회귀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개혁 정신과 위민 사상은 후대에 귀감이 됐고, 메이지 유신기의 개혁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막부 시대 최후의 대개혁가로서 그가 남긴 족적은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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