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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북극 탐험의 역사 목숨을 건 인간의 도전

아시겠죠? 발행일 : 2025-04-25

지구의 가장 극한 환경인 남극과 북극은 오랫동안 인류의 호기심과 도전 정신을 자극해왔다. 영하 수십 도의 극한의 추위, 끝없는 얼음 평원, 폭풍과 블리자드가 휘몰아치는 이 불모지에 인간은 왜 끊임없이 도전했을까? 이 글에서는 남북극 탐험의 역사를 통해 극한의 환경에 맞서 싸운 탐험가들의 용기와 인내, 때로는 비극적인 결말로 끝난 그들의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남북극점을 향한 목숨을 건 레이스와 그 과정에서 얻은 과학적 발견, 그리고 현대 극지 탐험의 의미까지 극지 탐험의 모든 것을 알아보자.

 

북극 탐험의 시작 - 북서항로를 찾아서

북극 탐험은 15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유럽 국가들은 아시아로 가는 새로운 무역로를 찾기 위해 북서항로와 북동항로 개척에 관심을 가졌다.

 

영국의 마틴 프로비셔는 1576년 북서항로를 찾아 첫 항해를 시작했다. 그는 비록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현재의 바핀섬 지역을 탐험하며 북극권에 대한 유럽인의 지식을 넓혔다. 헨리 허드슨도 1610년 허드슨만을 발견하며 북극 탐험에 큰 족적을 남겼으나, 선원들의 반란으로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19세기 초, 영국 해군은 존 로스, 윌리엄 패리 등의 탐험가를 파견해 본격적인 북극 탐험을 시작했다. 특히 패리는 1819년 항해에서 당시 최고 북위 기록을 세우며 북극해 탐험의 선구자가 되었다.

1845년 시작된 존 프랭클린 경의 원정은 북극 탐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비극 중 하나다. 에레버스호와 테러호 두 척의 배와 129명의 선원으로 출발한 프랭클린 원정대는 완전히 실종되었다. 이들을 찾기 위한 수많은 구조 원정이 조직되었고, 이 과정에서 북극 지역에 대한 지도 제작이 크게 진전되었다.

 

🧊 북극점을 향한 경쟁 - 누가 먼저 도달할 것인가?

19세기 후반부터 탐험가들의 궁극적 목표는 북극점 정복으로 바뀌었다. 이는 단순한 지리적 탐험을 넘어 국가적 명예와 개인적 야망이 결합된 치열한 경쟁이었다.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는 북극점 정복에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여러 차례 실패 후 1909년 4월 6일, 그는 마침내 북극점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 프레데릭 쿡 역시 1908년 4월 북극점에 먼저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피어리와 쿡의 논쟁은 당시 큰 스캔들이 되었다. 결국 피어리의 주장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지만, 현대 연구자들은 두 사람 모두 실제 북극점에 정확히 도달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측량 장비의 한계와 극한 환경에서는 정확한 위치 파악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현대적 의미에서 확실하게 북극점에 도달한 첫 사람은 1926년 항공기로 북극점 상공을 비행한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이거나, 같은 해 비행선 '노르게'호로 북극점을 통과한 이탈리아의 움베르토 노빌레일 가능성이 높다. 1948년에는 소련의 알렉산드르 쿠체노프가 북극점에 착륙한 첫 비행기를 조종했다.

해상에서는 1958년 미국의 핵잠수함 '노틸러스'호가 북극해 밑으로 항해해 북극점을 통과했고, 1977년 소련의 원자력 쇄빙선 '아르크티카'호가 최초로 해상에서 북극점에 도달했다.

🚢 남극 탐험의 시작 - 미지의 대륙을 찾아서

남극 탐험은 북극보다 늦게 시작되었다. 18세기까지 유럽인들은 남극대륙의 존재 자체를 확신하지 못했고, '테라 아우스트랄리스 인코그니타'(미지의 남방 대륙)라는 가설적 대륙을 상상했다.

남극 탐험의 선구자는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었다. 그는 1772-1775년 항해에서 남극권을 최초로 가로질러 남위 71도까지 도달했지만, 남극대륙을 발견하는 데는 실패했다. 쿡은 "나보다 더 남쪽으로 가려는 사람은 내가 가지 못한 곳을 탐험할 수 있겠지만, 그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1820년 1월, 러시아의 파드리 벨링스하우젠과 미하일 라자레프는 남극대륙을 최초로 목격한 것으로 여겨진다. 같은 해 영국의 에드워드 브랜스필드와 미국의 나다니엘 파머도 비슷한 시기에 남극대륙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남극 내륙 탐험은 19세기 후반에 시작되었다. 1895년 노르웨이의 헨릭 불은 남극 본토에 첫 발을 디딘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1897-1899년 벨기에의 아드리안 드 겔라슈가 이끈 '벨기카' 원정대는 최초로 남극에서 겨울을 보냈는데, 이 원정에는 나중에 유명해질 로알 아문센과 프레드릭 쿡도 참여했다.

🧭 위대한 레이스 - 아문센 vs 스콧, 남극점을 향한 경쟁

20세기 초, 남극점 정복을 위한 경쟁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탐험 레이스 중 하나가 되었다. 두 주역은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과 영국의 로버트 팔콘 스콧이었다.

아문센은 원래 북극 탐험을 계획했으나, 피어리가 북극점에 도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밀리에 계획을 바꿔 남극을 목표로 삼았다. 1910년 10월, 그는 '프람'호를 타고 남극을 향해 출발했다.

한편 스콧은 과학적 탐사를 주요 목적으로 한 영국 남극 원정대를 이끌고 있었다. 그는 '테라 노바'호를 타고 1910년 6월 출발했으나, 나중에야 아문센도 남극점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원정대의 접근 방식은 달랐다. 아문센은 개썰매에 전적으로 의존했고, 이누이트의 생존 기술을 채택했다. 반면 스콧은 개, 조랑말, 그리고 혁신적이지만 결과적으로 효과적이지 않았던 모터 썰매를 조합해 사용했다.

아문센과 4명의 동료는 1911년 12월 14일 역사적인 남극점 도달에 성공했다. 그들은 '폴하임'(극지의 집)이라는 작은 텐트를 세우고 노르웨이 국기를 꽂았다.

스콧과 그의 팀(에드워드 윌슨, 헨리 보워스, 로렌스 오츠, 에드거 에반스)은 1912년 1월 17일, 아문센보다 33일 늦게 남극점에 도달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노르웨이 국기와 아문센이 남긴 편지뿐이었다. 스콧은 일기에 "신이여, 이것은 끔찍한 장소이다"라고 적었다.

더 비극적인 것은 귀환 여정이었다. 스콧 팀은 극도의 추위와 식량 부족, 괴혈병 등으로 고통받았다. 에반스가 먼저 사망했고, 오츠는 "잠시 밖에 나가 있겠습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블리자드 속으로 걸어나가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했다. 결국 스콧과 남은 두 동료는 목적지에서 불과 11마일 떨어진 곳에서 텐트 안에 갇힌 채 1912년 3월 말 사망했다.

🔬 남극 탐험의 영웅들 - 섀클턴과 모슨의 업적

아문센과 스콧 외에도 20세기 초 남극 탐험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있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어니스트 섀클턴과 더글러스 모슨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탐험가 섀클턴은 1907-1909년 남극점 정복을 시도했으나, 목표에서 97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식량 부족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명성은 1914-1917년 '인듀어런스' 호 원정에서 비롯되었다.

이 원정의 목표는 남극대륙 횡단이었으나, 배가 웨델해 얼음에 갇히면서 좌초되었다. 10개월 동안 얼음 속에 갇혀 있다가 결국 배는 침몰했고, 원정대는 얼음 위에서 5개월을 더 보냈다. 섀클턴은 작은 구명보트로 800마일 떨어진 사우스조지아섬까지 항해한 후, 거친 산맥을 넘어 포경 기지에 도달했다. 결국 그는 모든 대원을 무사히 구조하는 데 성공했다.

섀클턴의 리더십과 생존 이야기는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 정신을 보여주는 전설이 되었다. 그는 1922년 세 번째 남극 원정 중 사우스조지아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한편, 호주의 더글러스 모슨은 1911-1914년 호주 남극 원정대를 이끌었다. 이 원정은 아문센이나 스콧과 달리 순수하게 과학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모슨 역시 극적인 생존 이야기를 남겼는데, 두 동료를 잃고 혼자서 겨울을 견디며 귀환에 성공했다. 그의 원정은 지질학, 기상학, 자기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데이터를 수집했다.

🚁 기계 시대의 극지 탐험 - 바드에서 현대까지

20세기 중반부터 극지 탐험은 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항공기, 무선 통신, 기계화된 운송수단이 도입되면서 탐험의 성격이 바뀌었다.

미국의 리처드 바드는 1929년 11월 29일 최초로 남극점 상공을 비행했다. 그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남극 원정을 이끌었으며, '작전 하이점프'와 같은 대규모 군사-과학 원정을 지휘했다.

1957-1958년 국제지구물리관측년(IGY)을 계기로 남극에 대한 과학적 관심이 급증했다. 영국의 비비안 푹스와 뉴질랜드의 에드먼드 힐러리는 1957-1958년 최초로 기계화된 차량으로 남극 대륙을 횡단했다.

1959년 체결된 남극조약은 남극을 평화적 목적으로만 사용할 것을 규정하고, 영토 분쟁을 동결시켰다. 이로써 남극은 과학 연구를 위한 국제 협력의 장이 되었다.

현대적 의미의 극지 탐험은 1989-1990년 아르베드 푹스의 국제 남극 횡단 원정과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또한 노르웨이의 보르게 오슬란드는 1990년 최초로 단독 도보로 남극 횡단에 성공했고, 1994년에는 북극도 횡단했다.

여성 탐험가들도 극지 탐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1993년 앤 밴크로프트와 리브 아르네센은 최초로 여성만으로 구성된 팀으로 도보 남극점 도달에 성공했다. 이후 펠리시티 애스턴은 2012년 최초로 단독 도보로 남극을 횡단한 여성이 되었다.

탐험가 국적 업적 연도
로알 아문센 노르웨이 최초 남극점 도달 1911
로버트 스콧 영국 두 번째 남극점 도달 1912
어니스트 섀클턴 영국 인듀어런스호 원정 생존 1914-16
리처드 바드 미국 최초 남극점 상공 비행 1929
비비안 푹스/에드먼드 힐러리 영국/뉴질랜드 최초 남극 대륙 횡단 1957-58
보르게 오슬란드 노르웨이 최초 단독 도보 남극 횡단 1990
펠리시티 애스턴 영국 최초 여성 단독 남극 횡단 2012

🌡️ 극지 과학의 발전 - 탐험에서 연구로

남북극 탐험의 역사는 단순한 지리적 발견에서 과학적 연구로 점차 초점이 변화했다. 오늘날 극지는 기후변화, 지질학, 해양학, 생태학 등 다양한 과학 분야의 중요한 연구 장소가 되었다.

남극은 특히 기후변화 연구의 핵심 지역이다. 남극 빙하 코어는 수십만 년 전까지의 대기 성분과 기후 변화를 기록하고 있어, 지구 환경 변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1998년 시작된 보스토크 빙하 코어 프로젝트는 42만 년 전까지의 기후 기록을 복원했다.

오존층 파괴 현상도 남극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1985년 영국 과학자들이 남극 상공의 오존층이 심각하게 얇아지는 '오존 구멍'을 발견했고, 이는 1987년 몬트리올 의정서 체결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남극은 또한 지질학적으로도 중요한 연구 장소다. 1990년대부터 진행된 ANDRILL 프로젝트는 남극 해저 퇴적물을 시추하여 수백만 년 전 남극의 환경 변화를 연구하고 있다.

북극 역시 기후변화의 영향이 가장 급격하게 나타나는 지역이다. 북극해 얼음의 급속한 감소는 지구 온난화의 가장 뚜렷한 지표 중 하나로, 국제적인 연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또한 극지 환경에서 생존하는 생물들의 적응 메커니즘은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연구 주제다. 남극 빙어의 '부동 단백질'이나 극지 미생물의 저온 적응 메커니즘은 의약품 개발과 바이오 기술에 응용되고 있다.

🌎 현대 극지 탐험과 환경 보호

21세기의 극지 탐험은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단순한 지리적 '최초'를 넘어 환경 보호, 기후변화 인식 제고, 과학 연구 지원 등이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현대 극지 탐험가들은 종종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영국의 루이스 폭스와 팀은 2003-2004년 남극 원정을 통해 기후변화의 영향을 기록하고 이를 교육 자료로 활용했다.

▲ 극지 관광의 증가 ▲ 자원 개발에 대한 관심 ▲ 기후변화로 인한 북극항로 개방은 새로운 환경적 도전을 가져오고 있다. 특히 북극해의 얼음이 녹으면서 새로운 항로와 자원 개발 가능성이 열리고 있지만, 이는 취약한 극지 생태계에 위협이 되기도 한다.

1991년 체결된 환경보호에 관한 남극조약 의정서는 남극에서의 광물 자원 개발을 50년간 금지했다. 그러나 북극은 남극과 달리 포괄적인 국제 조약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어, 북극권 국가들 간의 자원 개발과 항로 통제를 둘러싼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극지 연구 기지도 계속 확장되고 있다. 남극에는 현재 30개국이 운영하는 80여 개의 연구 기지가 있으며, 우리나라도 1988년 세종기지를 시작으로 2014년에는 장보고 과학기지를 설립했다.

남북극 탐험의 역사는 극한 환경에 맞선 인간의 도전과 생존 의지, 그리고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고자 하는 끝없는 호기심을 보여준다. 초기 탐험가들이 목숨을 걸고 얻어낸 지식과 경험은 오늘날 극지 연구의 토대가 되었고, 그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현대 사회에서 극지는 더 이상 '미지의 영역'이 아니지만, 기후변화의 최전선이자 지구 환경의 건강을 진단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극지 탐험과 연구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이제 그 목표는 단순한 정복이 아닌 이해와 보존으로 변화했다. 과거 탐험가들의 용기와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극지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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